본문 바로가기

생각 삶 사랑.../일상 소소한 이야기

강진 마량항 여행기

반응형

2019. 5. 4. 토요일.

오후 245, 원주집에서 전남 강진 마량항을 향해 출발했다.

412km, 5시간이 넘는 거리다.

화창하기보다는 뜨거운 날씨였다.

지역에 따라 섭씨 29도까지 오른다는 예보가 있었다.

나는 한껏 기분이 좋았고 도반(남편)은 나의 기분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도반은 내 생일을 기념해서

남해 산지에서 산낙지 탕탕이를 사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싱싱한 오이를 생각해. 그럼 내 생일을 잊지 않을 거야.”

 

산낙지를 먹기 시작한 건 마흔이 넘어서부터였다.

쓰러진 소도 일으키는 효험이 있다니

이후 기력이 쇠할 때 혼자 가서 먹기도 했다. 스스로 기괴스럽다고 느꼈다.

 

휴게소에 들러 이영자의 소개로 유명해진 소떡소떡을 먹었다.

소시지와 떡을 번갈아 꼬치에 꽂아 살짝 튀겨낸 간식이다.

머스터드와 케첩을 잔뜩 뿌렸다. 쫀득 고소했다.

< 생거진천 >

도로 위에서 날이 저물었다. 사방이 캄캄한 지방 도로를 전조등에 의지해 나아갔다.

커브 길에서는 잠깐씩 상향등으로 시야를 확보했다.

살다 보면, 사방이 온통 캄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전조등 같은 존재, 내게는 하나님.

 

기다리는 이가 없으니 당일에 강진까지 가야 할 이유는 없으나

도반은 가고 싶어 했고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920분쯤 마량항에 도착, 주차가 쉬운 곳에 숙소를 정했다.

여관 사장의 안내로 허름한 숙소를 둘러 본 도반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은 표정으로 내게 괜찮냐고 물었는데

나는 암시랑토 않았다.

술로 불콰해 있던 사장은 칫솔 5, 면도기를 3개나 챙겨 주었다.

숙소 화장실에서 대왕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꺅! 소리를 질렀다.

도반이 바퀴벌레 출몰로 추정되는 구멍을 휴지로 막았다.

 

<카카오맵 퍼온 사진>

열 시가 가까운 시각이라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았다.

실내포장마차에서 낙지 탕탕이, 해삼, 전어구이를 주문했다.

도반은 잔인하다며 낙지 탕탕이를 잘 먹지 않았다.

낙지는 싱싱해서 달았고 참기름은 꼬~소했다.

해삼은 선도가 살짝 떨어졌지만 오독오독 식감이 좋았다.

온갖 살아있는 것들의 감정에 민감하면서 낙지의 고통에는 눈 감아버리는 것.

나는 종종 이중적이고 가끔 잔혹하다.

마량항 주변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자 피부가 매끌거렸다. 물이 좋았다.

잠자리에 민감한 도반이 작게 코를 골며 잘 잤다.

허름한 외관에 비해 만족스런 곳이었다.

늦은 시각이라는 불리한 조건때문에 택한 숙소였다.

사람도 외양이 허름하면 불리한 조건과 만날 확률이 높다.

타인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기, 스스로를 단정하게 꾸미기.

 

 

2019. 5. 5. 주일

오랜만에 맑은 공기로 아침을 맞았다.

바닷가 전망대로 가는 길, 비릿하고 짭짤한 바다 냄새가 빈속에 훅 들어왔다.

바닷가 편의점 CU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뽑아 나눠마셨다.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을 위해 주작산 자락으로 이동했다.

오전 1030.

<주작산이 둘러 친 고요한 마을 전경>

고즈넉한 동네를 구경하고 기사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점을 먹었다.

저녁에는 거하게 전라도 한정식을 먹을 참이었다.

간단한 한국어 소통도 안 되는 외국 여성이 서빙했다.

죽순나물, 제육볶음, 전어조림, 파김치... 반찬은 모두 맛있었다.

특히 청양고추로 칼칼한 맛을 낸 맑은 조개탕이 일품이었다.

도반의 제안으로 두륜산 대흥사로 향했다.

원주에서는 볼 수 없는 야자수가 즐비한 도로가 신기했다.

이승이 아닌 것 같은 신묘한 풍광의 법흥사가 생각났다.

대흥사의 풍광은 이승 수준에서 빼어났다.

<대흥사로 향하는 도반의 뒷모습>

수백 년 전 부도 탑 앞에서 인생무상을 떠올렸다.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보는 일다 술 한 잔만도 못한 일로 여겨졌다.

(- 노천명, ‘별을 쳐다보며)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를 기도문처럼 되뇌며 고통에 온전히 튀겨질 때

로마의 카타콤에서 봤던 백골을 생각했다.

나 역시 티끌이 된다는 사실이 묘한 위로가 되었다. 부도탑도 그랬다.

‘...

현명하게나. 포도주는 (그만 익혀) 따르고.

짧은 인생, 먼 미래로의 기대는 줄이게.

...

카르페 디엠(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 호라티우스'

 

예로부터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졌던 연리근을 보며 세월과 관계를 생각했다.

하나가 되는 관계보다 따로 또 같이를 현명하게 오가는 관계가 좋다.

절 입구에 자리한 한옥 여관 유선관에 들러 도토리묵 무침에 탁주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뜨내기손님을 상대하는 거개의 음식점 맛이었다.

중정에 핀 철쭉이 예뻤다. 많은 손님이 들고 났다.

<유선관 홈페이지에서 퍼온 사진>

해남으로 향하는 길에

산에서 노란 연기같은 것이 느......... 풀려나가는, 몽환적인 광경을 보았다.

처음 보는 광경에 송화가루 날리는...’이란 시가 생각났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윤사월

<삐에로님의 사진 퍼옴>

도반과 함께 송홧가루 날리는 풍경을 볼 수 있음이, 감사했다.

평생, 잊을 수는 없으리란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오후 4시쯤 도착한 해남읍에서 제일 먼저 숙소부터 정했다.

해가 잘 들고 넓고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해남읍을 천천히 걸어서 둘러 보았다. 외국인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인구 25천 명 남짓의 지역인데 약국이 십 여 개는 되었다.

유명 떡갈비 한정식집 천일식당에 손님들이 길게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줄을 서서라도 먹고 싶었지만 도반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무엇을 먹느냐는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대부분 도반의 마음을 따른다.

 

해남읍을 다시 천천히 둘러 보고 손님이 가장 많은 곳으로 들었다.

방석을 달랬으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 여성이 서빙을 했다.

고기의 육질은 퍽퍽했고 숯향은 잘 배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도반이 심한 길치인 내게 숙소를 찾아보라고 했다.

길치라서 좋은 점은,

어느 곳에 있든지 길을 몰라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 원주, 파리, 시드니, 동경, 마닐라, 방콕...

도시마다 분위기와 언어가 달랐을 뿐

어디가 어딘지 모르긴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거의 항상 새로운 길, 모르는 길인데 그때마다 당황하지 말고~

스마트 폰이나 사람에게 물으면 된다.

 역시나 틀린 방향을 잡아 씩씩하게 걸어가는 나를 도반이 잡아 끌었다.

 

 

201956. 월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주에 들러 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미슐랭에 소개되었고 수요미식회에 나왔던 한국관에 갔다.

대기자가 많아서 대기자 리스트에 이름을 적고 삼십 분 넘게 기다려야 할 거 같았다.

기다려서라도 먹고 싶은 내 마음에 이번에는 도반이 맞춰주었다.

석 장의 대기자 리스트 마지막 장에는 2번 줄이 비어 있고 7번까지 적혀 있었다.

나는 2번에 적었고, 긴 기다림 끝에 3번보다 먼저 들어갔다.

3번이 실수로 한 줄을 띄어 적었고 4번부터는 습관적으로 아래로 적어 나간 거 같았다.

 

외국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오지랖이 발동해서 한 외국인에게 대기자 리스트에 이름을 적어야 한다고 알려줬다.

피터라는 외국인이 리스트에 이름을 적고 나서 고맙다며 근데 왜 줄을 서 있는지 물었다.

맛있고 유명하니까 그런 거 같다고 답해 주었다.

피터가 다시 물었다.

그게 아니라 대기자 리스트에 이름을 적었는데 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냐고.

줄 밖에서 기다리든 줄을 서서 기다리든 기다리는 사람의 선택이라고 말해 주었다.

원어민이 내 짧은 영어를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쌩큐'라기에 '유아웰컴' 해 주었다.

 

한국관의 중정은 꽤 넓고 예뻤다.

수초가 없어 썰렁한 작은 연못에 금붕어 몇 마리가 살고 있었다.

육회 비빔밥과 전주 비빔밥, 모주 한 잔을 주문했다.

직접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을 사용한다고 한다.

밥을 씹을수록 미묘한 감칠맛이 느껴졌지만 줄을 서서 먹을 만큼의 맛은 아니었다.

모주는 원주에서 먹던 것보다 농도도 진하고 계피향과 단맛도 강했다.

알콜 성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관 옆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카페 여주인은 한옥 마을을 둘러 보려면 짐을 맡겨도 좋다고 했다.

연휴 마지막 날, 도로 사정을 생각해서 바로 원주로 출발했다.

도로 가에 마가목 꽃이 가끔 보였고 물푸레나무 흰꽃이 흐드러졌다.

물푸레 나무 꽃 마가목 꽃

도로 사정을 실시간으로 손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이 감사했다.

집에 도착하자 역시 집이 최고~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함께 떠나고 함께 도착한 도반이 있어서, 감사한 여행이었다.

 

<바람에 물결치는 청보리 밭>

 

<나무를 저리 정성껏 벨 만큼 큰 사랑일까, 자연을 망친 사랑일까.>

반응형

'생각 삶 사랑... > 일상 소소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밀과 거짓말  (0) 2019.05.23
카페에서 누리는 소확행  (0) 2019.05.15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0) 2019.04.24
식약동원 밥이 보약  (0) 2019.04.17
평범하지 않은  (0) 201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