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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가 적었던 남자에 대한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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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해야 할 도서 리뷰가 3건 밀려 있다. 아무리 바빠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자는 심산으로 드립커피를 내렸다. 핸드밀로 원두를 갈자 커피향기가 은은하게 번져나왔다. 조심스레 뜨거운 물을 붓고 뜸을 들이자 커피빵이 부풀어 오르며 커피향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케냐 더블A의 새콤한 산미와 쌉싸레한 맛에 감탄했다. 커피 한 잔이 감성을 건드렸고 리뷰 작성은 미룬 채 회상에 빠져버렸다.

 

계속 같은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그것 말고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 송길영 저, 그냥 하지 말라중에서

 

나는 여중, 여고, 여대를 졸업했다. 등한히 여긴 학업을 참회하듯 취직해서는 일중독자로 살았다. 이십대의 나에게 애인이 될 남자란 모름지기 하이틴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 비스므리해야 했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소설 속 주인공처럼 재력과 지력, 외모와 체력을 겸비한 남자는 현실에 없었다. 그런 남자가 곁에 있다한들 하이틴 로맨스의 여주인공처럼 쭉쭉빵빵 미인이 아닌 나를 좋아했을까.

 

스물아홉의 어느 날, 일만 하다 저무는 이십대가 아쉬워 영화 동호회 활동을 시작했다. 스물아홉 살씩이나 처묵처묵 하고도 하이틴 로맨스를 꿈꾸던 댕청한 나는 동호회에서 호감으로 다가온 민재(가명)가 좋은 사람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민재는 정말 좋은 분과 결혼했다. 다행히 류(가명)가 다가왔을 때는 그가 좋은 사람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류와 알콩달콩 사랑을 다해 사랑하다 헤어진 후 다양한 남자들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1. 같은 말을 반복 하던 Y

여행 동호회에서 만난 Y는 날렵한 투스카니를 모는 남자였다. 스포츠카를 모는 사람은 자유분방할 거 같은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Y는 온순한 표정과 단정한 말투를 구사했고 잘 웃었다. 여행지에서 여자 회원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으면 옆에서 조용히 도와주곤 했고 뒷정리를 도맡아 했다.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도 Y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가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흔쾌히 응했다. Y의 스포츠카를 타고 자유로를 달려 파주 헤이리 마을로 향했다. 투스카니는 차체가 낮아서 승차감이 좋지 않았다. 그는 스포츠카의 성능을 과시하듯 소위 '칼치기'를 했고 나는 기겁해서 안전하게 운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Y가 운전하면서 시중에 유행하는 유머를 몇 개 했고 나는 크게 웃었다. 식사 중에 운전할 때 말한 유머를 또 했다. 나는 작게 웃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또 같은 유머를 했다. 이번에는 그의 기억력이 걱정 돼서 웃을 수 없었다.

저기...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예요?”

“00씨를 재미있게 해 주고 싶은데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그랬다. 매너 좋고 성격 좋은 Y는 유머 포함 전반적으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나 역시 아는 게 별로 없으면서도 Y에게 향했던 일말의 호감이 사라져 버렸다.

삼룡이 역의 유승호

 

2. 말수가 적었던 R

R은 말이 별로 없었다. 말이 많은 나에게 과묵한 남자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때는 몰랐다. 말이 없는 사람은, 아는 게 없어서 할 말이 없는 사람과 수레가 꽉 차듯 든 게 많아서 과묵한 사람의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을.

 

직장에서 SKY 출신들, 해외 유학파 출신들과 일했었다. 학벌과 인품은 전혀 상관없다는 걸 알았기에 R의 학벌이 낮은 건 상관없었다.

 

그런데.

R은 운전을 하면서 차가 끼어들 때마다 화를 냈다. 본인도 종종 끼어들면서 전형적인 내로남불이었다. 그런 경우를 여러 번 겪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 R~ 운전하다보면 차가 끼어드는 건 다반사인데 그때마다 화를 내면 우리만 손해잖아요. 바쁜 일이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아요, 우리~

 

R은 말이 없었고 나는 그걸 내 말에 수긍한 것으로 이해했다.

반전 매력의 김수현

 

특별한 날이라 근사한 레스토랑에 식사 예약을 했다. 그런데 레스토랑 측 실수로 예약이 안 되어 있었고 우리는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R은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화를 냈다. 내 기준에서는 전혀 화낼 일이 아니었다. 레스토랑 책임자가 와서 사과하며 와인을 서비스로 주겠다고 했다.

 

: R, 기분 좋은 일은 아지만, 화낼 일도 아닌 거 같아요. 여기서 기다리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 선택하면 돼요.

 

그간 말이 없던 R이 드디어 말했다.

“00씨는 사사건건 누구 편을 드는 거예요?!!”

 

아는 게 없어서 말이 없었던 R, 사건을 보는 시각도 유아기에 머물러 있었다. 나의 간곡한 말들을, 편 가르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니. 댕청한 나는 R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틱낫한 스님의 책 를 선물했다. R은 읽지 않았다. R을 통해 나는 나 자신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임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3. 선한 눈빛의 C

선한 눈빛의 조용한 C를 만났을 때는 말 없는 사람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타인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C의 데이트 신청을 주저 없이 거절했다.

 

: 지식과 대화 수준이란 게 남녀사이에 중요할까? 지식보다 지혜와 인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R이 아는 게 없어서 말이 없었던 거라는 걸 알아 차렸어도 계속 만났던 거야. 다른 문제들이 계속 생겨서 결국 헤어졌지만. 내가 C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뇌순한 이미지 때문에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건 교만인 거 같아...

 

친구 : 누구에게나 내면 깊숙한 곳에 교만이 있어. C는 좋은 면이 많은 분이지만 재미있는 대화 상대는 아닌 거 같아. C는 단순하게 너에게 호감이 있어서 데이트 신청을 했던 거고 너는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본 후 둘이 잘 맞지 않을 거라고 판단해서 거절한 거지. 어쩌면 C가 못 보는 것을 너는 본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 교만하다고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무한도전 뇌순녀 특집

 

도올 김용옥님은 저서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지식이 쌓이고 쌓여서 무르익으면 지혜가 된다고 했다. 지식과 지혜가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식이 무르익지 않으면 교만해진다. 고개를 빳빳이 든 이삭처럼.

배워라. 남이 나를 무시하지 않도록. 더 배워라. 내가 남을 무시하지 않도록.” - 양준익.

 

누군가는 인간의 사고력은 구사할 수 있는 어휘력(지식)에 영향 받는다.’고 했다. R을 통해 앞의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R의 유아기적 사고와 낮은 이해력에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럼에도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 꽤 오랜 기간 만남을 지속했다. 에리히 프롬의 너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책임감과 숭고한 의지적 사랑만 작용했을까. 틀린 길임을 알고도 돌아 설 용기가 없어서 가던 길을 계속 간 건 아니었을까.

 

왜 나는 R같은 사람을 만났을까. 내가 R과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내 주위엔 왜 괜찮은 사람이 없을까 의아하다면 내 수준을 돌아봐야한다. 혹자는 독한 말을 했다. “주위에 쓰레기들만 있다면 당신이 쓰레기통에 있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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