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이 남기는 것은, 오로라
---------------------------- 이병률
당신 사라지고 당신 주변 사람들은
당신의 기물 앞에 앉아
당신의 비밀번호를 조합해나가기 시작합니다
노트북의 비밀번호를 찾는 사람들은
당신 생일부터 떠올립니다
(중략)
자, 한사람의 지도 조각들이 다 맞춰진다 치도라도
한 사람의 심연이 내뿜는 저 밤하늘의 마지막 전기를 만질 수 있을까요
--- 이병률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2020년 문학동네)』 수록
이병률 시인의 시 '한 사람이 남기는 것은, 오로라'를 읽으며
제가 사라지고 나면 세상에 남겨질 기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변변한 물건은 하나도 없네요.
그나마 젊을 때 들어두었던 종신보험과 원룸 하나.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을 동산이나 부동산에서만 찾는 저는, 역시 속물입니다.
나 : 오빠, 혹시라도 내가 먼저 하늘나라 가면 보험금 찾아서 마음껏 쓰세요. 선물이야~
도반(남편) : 그걸 어떻게 쓰겠니...
나 : 그럼 좋은 곳에 기부하면 되겠네~!
'한 사람의 심연이 내뿜는 저 밤하늘의 마지막 전기를 만질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의 심연이 내뿜는 저 밤하늘의' 오로라에 가 닿을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을 깊이, 아주 깊이 사랑해야합니다.
내가 보고 싶은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위해 판단과 편견을 내려놓아야겠지요.
매일 점심 식사 후 도반은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러 갑니다.
도반의 자전거 탄 모습이 사라지기까지 눈으로 좇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남편 평안과 건강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생명싸개 안에 보호하심 감사합니다.
주님 베풀어주신 기적과 사랑을 간증하게 하소서.'
운동에서 돌아온 도반은 얼음장같은 손을 제 볼에 데곤합니다.
도반 : (장난스런 눈빛으로) 아~ 정말 따뜻하다!
"앗! 차가워!!" 오도방정을 떨어야 도반은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엊그제.
치병 중인 도반의 심연이 헤아려져서, 꼬옥 끌어안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가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한 사람의 심연이 내뿜는' 오로라를 만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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