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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우는 당신의 컨텐츠/도서리뷰

나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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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나의 두 사람 My Gandmother, My Grandfather

지은이 : 김달님

출판사 : 어떤 책

전자우편 : acertain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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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기간 : 2018. 11.

 

서정 가득한 문장이 마음에 와 닿았다. 평범하지 않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을, 평범한 눈길로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괄호 안은 내 생각을 적은 것.

 

5

나는 내 부모가 예감하지 못한 시기에 갑작스레 세상에 오게 됐다. 너무 이르게 온 나머지 그들은 누구의 부모보다 누구의 자식인 게 더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문장.)

 

6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숨죽여 주변 눈치를 살폈다. 너무 당연한 룰에서 나만 벗어난 것 같은 초조함. 슬프기보다는 당혹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작가를 가만히 안아 주고 싶었다.)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 가정이 불행한 사연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불행과 비교해 위안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화목한 가정이란 누구나 기대하는 실체 없는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행복과 불행을 고루 느껴 본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 있었다.

 

내가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내 늙은 부모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 아이를 먹고 입히기 위해 되풀이된 돈벌이의 고됨...

7

내가 끝내 불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아끼지 않고 주었던 사랑 덕분일 것이다.

(끝내 불행하지 않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때론 도망치고 싶었고 잊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종내에는 자주 후회했다.

기껏 키운 자식들이 부모의 바람을 꺾고 품을 떠나는 일을 몇 차례 겪었으면서도 또다시 나를 거두어 키우는 일이 그들에게 과연 기쁨이었을까. 남은 삶마저 비슷하게 소진될까 봐 혹시 망설여지지 않았을까. 후회되지 않았을까. 어떻게 최선을 다해 나를 키우고 사랑한다 말해 줄수 있었을까.

 

만약 평범한 내게 조금이라도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내 늙은 부모와 함께 보냈던 시간 덕분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랑을 보여 준 적 있다면, 그 또한 내 늙은 부모가 주었던 사랑을 사랑인 줄 알고 자란 시간 덕분이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안다. 특히 어린 시절에 받은 사랑은 얼마나 소중한지.)

 

20

할아버지는 자신이 쓰던 양귀비염색약을 아낌없이 발라 주었는데 넉넉한 인심과 달리 손길이 다소 섬세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 장점은 아주 까맣게 염색된다는 점이었고, 단점은 너무 까맣게 염색된다는 점이었다.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는 문장)

 

25

분명 내가 존재했던 시간들이지만 정작 내 기억 속엔 없는 장면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한 때의 내가 그들이 기억 속에만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아이의 시간은 부모의 기억에 빚져 흐르나 보다.

작은 네가 올해의 여름을 잊어버려도 괜찮아. 엄마가 계속 기억해 둘게.

- 일본 제과 회사, 에자키 글리코 광고 카피

 

31

어쩔 줄 몰라 두 눈만 껌뻑거리던 나를 할머니는 상기되 얼굴로 바라보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했던 얼굴. 어떻게 너까지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할머니는 소리 내 울었다. 그 말만 하고 방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늦은 저녁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안쓰러워서 나도 울었다.)

 

32

아마도 그때 할머니는 외롭고 힘든 시간을 홀로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한 어둠이 할머니 삶에 스며들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스웨터를 짰던 날들은 스스로를 묵묵히 견디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제 와 겨우 짐작을 해 볼 뿐이다. 만약 그랬다면 할머니는 어린 나뿐인 그 집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40

하루는 첫마디만 들어도 줄줄 외는 이야기를 처음인 듯 시작하는 할머니에게 짜증을 냈다. 도대체 몇 번째 하는 말이냐고, 똑같은 이야기가 지겹지도 않냐고. 그러자 머쓱한 얼굴로 할머니가 대답했다.

내가 다른 할 말이 어디 있겠냐.”

(우리 엄마가 같은 말을 반복하면 나도 짜증이 나곤했는데...)

 

47

그리고 10년이 지나, 그사이 두 번의 큰 수술을 받은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고, 내가 고향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서 그제야 당신의 말이 한꺼번에 슬펐다. (할아버지, 다음에 태어나면 꼭 어디든 자유롭게 떠나는 여행가가 되세요.)

 

52

너 결혼할 때 다른 건 못 해 줘도 이 집 하나 줄 수 있다는 거, 그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지?”

가끔씩 혼자 사는 방에 켜진 불빛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스로 켜고 끄는 1인분의 불빛이 외롭고 막막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엔 잊지 말고 기억하기를. 해가 짧아진 어느 겨울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노란 불빛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그들이 영원히 집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집은 언제나 우리 셋, 우리들의 집.

 

63

할아버지는 무엇을 심는다고 하지 않고 숨군다고 말한다.

숨구다는 말은(중략) ‘이라는 말 덕분에 땅속에 숨을 불어넣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숨군다는 말이 좋다.

 

할아버지는 텃밭뿐 아니라 내 삶에도 많은 것들을 숨궈 준 사람이다. 그것들이 시들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돌보는 일. 내게 남은 귀중한 몫이다.

(저자의 삶에 숨궈진 것들이 잘 자라서 좋은 글로 풀려 나오길.)

 

65

그들은 비슷하게 빠듯한 삶을 사느라 명절 때에도 집에 잘 내려오지 못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혼자 사는 큰딸에게 김치를 가져다준다, 기관지가 안 좋은 둘째 딸에게 수세미즙을 가져다준다, 하며 서울로 향하는 운전대를 잡았다.

 

75

매월 할아버지가 하루의 노동을 확인받는 도장이었다.

수첩은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값은 무거웠다. 하루하루 세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할아버지의 노동이 담긴 무게였다. 어떤 성실함은 때로 슬픔으로 다가온다.

(할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느낄 줄 아는 저자. 철 들었네.)

 

더 이상 수첩을 채울 수 없는 나날. 할아버지가 느꼈을 막막함과 두려움. 박탈감과 무력함 같은 것들.

당신이 어딘가로부터 밀려났다고 생각한 적 없다고. 공사를 마치고 돌아온 할아버지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봉지의 달콤한 과자들이 어린 나에겐 즐거움이었지만 그보다 할아버지와 셋이 자는 잠이 더 든든했다고.

 

84

그런데 네 명의 자식은 모두 공부와 상관없는 길로 빠졌다. 할머니는 가난이 너무 깊어서라고 했다. 자식들이 이길 수 있는 가난이 아니었다고.

할머니의 말대로 그들이 정말 공부를 잘했다면, 내 자식은 출세할지 모른다는 믿음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때마다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87

나도 따라 손을 흔들며 익숙한 자동차 불빛이 천천히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혼자였다. 쓸쓸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92

방송국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할아머지는 취직 선물로 카메라를 사 주겠다고 말했다. 방송국에 들어갔으니 성능 좋은 카메라가 필요할 거란 이유였다. “할아버지, 저는 작가인데요?”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방송국은 카메라로 촬영을 하는 곳인데 너만 없어서 되겠냐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쓰라고 말했다.

 

화면 아래 코팅이 반쯤 벗겨진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안에 내가 모르는 할아버지의 시간이 차례차례 저장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덕분에 할머니도

가끔 다른 배경을 가질 수 있었겠구나.

 

사진 속 할머니의 작은 몸을 보며 그곳의 시간에 조용히 감사 인사를 했다.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내 어릴 적 사진들도 할아버지가 한쪽 눈을 찡그린 얼굴로 남겨 주었을 것이다. 덕분에 지나간 시간 속의 내가 여전히 선명한 색감으로 남아 있다. 아마 내가 카메라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진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사진을 돌려 보았다. 내가 없는 사이 할아버지가 몰래 남겨 놓은 편지들 같기도 했다.

 

98

가스레인지와 이부자리와 욕실이 세 걸음 안에 다 들어오던 방. 친구와 둘이 누우면 옆집 남자의 네이트온 접속 소리가 또로롱 들리던 방. 앞집 생활이 훤히 보여 창문을 활짝 열어 두지 못하던 방. 2층 세입자들이 함께 쓰던 세탁기를 열면 옆집 남자의 옷가지가 잔뜩 엉켜 들어 있던 방.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이름은 모르면서 서로의 생활은 충분히 들키며 살았던 방.

(‘서로의 생활은 충분히 들키며 살기 힘들었겠다.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그들이 돌아간 밤. 단칸방에 누워 언젠가 나도 방이 아닌 괜찮은 집에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조만간 더 좋아질 거라고 내가 나를 안심시킨 뒤에야 겨우 마음이 편해졌다.

 

불을 켜지 않아도 낮에는 충분히 환한 집.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들일 수 있는 집. 최소한 부엌과 방이 분리된 집.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미로 같지 않은 집. 적어도 할머니가 쉽게 다녀갈 수 있는 집. 언젠가 나도 그런 집에 살 수 있겠지. 더 늦기 전에, 언젠가는.

(꼭 원하는 집에 살게 되기를. 더 늦기 전에. )

 

101

할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졸업식에 와 줄 테지만 혹여나 친구들의 가족 풍경과 나만 다를까 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할머니가 정말 오지 않을까 봐 초조했다.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돼서 할머니에게 미안했다.

(열셋이었던 저자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짠했다.)

 

102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많은 것을 무릅쓴 용기임을 때때로 사람들은 알아주지 못했다. 그런 날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나 또한 열이 오른 얼굴로 내내 덜컹거렸다. 물론, 할머니의 마음은 나보다 더 큰 진폭으로 덜컹거렸을 것이다.

 

118

돌아보면 할머니는 늘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당신의 습관이 된 걸까 봐 마음이 아팠다.

 

120

지금은 한 뼘보다 더 긴 색연필이 부지런히 닳아 엄지만큼 줄어들면 좋겠다. 그리고 그만큼 할머니의 시간에 여러 색깔이 스며들기를.

 

130

겨울의 초입, 두 뺨에 닿는 공기가 제법 차가워지면 동네 감나무엔 하나둘 붉은 등이 켜지듯 감이 익었다.

 

136

그때 나를 살려 줘서, 살아 줘서 고맙지. 그래로 다음에 태어나면 결혼은 안 하고 싶어. 애들 고생시킨 게 한이야. 다음번엔 내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길 바라.

 

146

내 몸 안에도 할머니의 밥을 먹고 새겨진 태가 있을 것이다.

그 태가 선명히 남아 있는 한, 사는 동안 계속 당신의 음식이 그리울 것이다.

 

151

이내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소란스레 떠들던 아이들도 종소리와 함께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멀어지던 할아버지의 뒷모습. 그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종소리가 울리고, 그 복도에 서 있는 내 앞에서 할아버지가 발길을 돌리는 참인 것 같다.

(이 기분, 잘 알고 있다. 할아버지의 절절한 사랑이 마냥 푸근한 것이 아니라 가슴 시린 느낌을 동반한다는 걸.)

 

161

차 뒷자석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 꾸민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색하고 촌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잘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른 뒤 세 사람이 함께했던 어느 좋은 날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162

들떠 있던 마음이 조용하게 가라앉던 즈음.

아유, 이게 뭐야.”

바닥에 주저앉은 할머니가 갑자기 웃음을 떠뜨렸다. (중략) 이상하게도 그땐 웃음이 나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정말 괜찮다는 듯이.

 

164

살면서 그런 시간을 통과할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이 하루를, 깊이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깃드는 시간.

171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가 나를 더욱 잘 살고 싶게 한다. 글을 써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한다.

언젠가 내 글이 누군가의 세상에 작은 빛을 켜 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서른 해 전,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할아버지의 바람은 이루어질지 모른다.

(달님의 글 덕분에, 적어도 내 마음에 작은 빛이 켜졌다. 고마운 일이다.)

 

178

나와 가장 가까운 이의 고통을 그저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마음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179

부모에게 상처를 주었던 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자신이 용서를 구하기 전 이미 부모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193

할머니는 엄마가 아주 어린아이를 두고 떠났다는 사실보다 세상 전체를 두고 떠났다는 거짓말이 내게 덜 상처가 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197

다만 콤플렉스의 나쁜 점은 스스로 콤플렉스를 인식하기 이전으로 쉽게 돌아갈 수 없고,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질기게 퍼져나가 삶을 잠식하는 데 있다. 콤플렉스는 시기와 질투를 먹고 쑥쑥 자랐다. 아이가 여자의 몸으로 자라날 때 필요한 엄마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격지심으로 남아 나를 불완전한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198

오래전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 삶을 살라고 했던 할머니도 알았을 것이다. 어릴 땐 눈치 채지 못한 미움이 어느 순간 내안에 뿌리를 내려 점차 몸집을 키워 가게 될 것을. 안타깝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중략) 그럼에도 할머니는 내게 말해 주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너를 키울 거야.”

 

199

여전히 내 안에 콤플렉스가 남아 있고, 엄마가 되는 일에 두려움도 있다. 다만 전화 한 통에도 매번 감사하다고 말하는, 나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기꺼이 내준 두 사람을 생각하면 내가 받은 만큼 내 아이에게 돌려줄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나는 내게 말을 건다. 내 결함이 내 삶을 대신할 수 없고 엄마의 자격을 정해 줄 수도 없다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아이를 기르는 자세이고 과정이 될 테니까. 그렇게 나아질 것이다. 나도 엄마가 될 수 있다.

 

207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고. 다리가 이러니까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며 산 거야. 평생 행복이란 게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지

그런데 네가 태어난 거야. 너는 모르겠지만 난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참 행복했다. 처음으로 내 말벗이 생긴 거 같았거든. 너는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알아주는 것 같았어.

 

209

너는 둘도 없는 자식이었어. 난 네가 내 편이었다는 걸 알아. 고맙다. 행복하게 잘 살아.

 

너는 낳기는 너거 아버지가 낳았지만 식구들 중에 내 마음에서 제일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210

근데 나중에 파출소에서 연락이 오더라고. 가 보니 네가 쪼그려 누워 자고 있어. 그때 내가 제일 행복했지. 너를 다시 찾았으니까.

나는 너한테 요구 같은 거 바라는 거 없다. 인제는 네가 앞길을 가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너는 이미 네가 살아 나가는 앞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네가 나보다 똑똑한데 해 줄 게 뭐가 있노. 네가 바라는 길로 잘 걸어가기를 바란다. 나는 그거면 됐다.

 

216

나와 다르게 그들은 가끔 친숙한 곳에 죽음을 맡겨 놓은 사람들처럼 군다. 마치 언제라도 그것을 찾으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어느 날 밤엔 자는 나를 깨워 자신의 보험 서류가 어디 있는지, 어디에 연락하면 되는지 미리 당부한다. 내가 사진을 찍자고 말하면 할아버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빗고 할머니의 머리카락도 가지런히 빗겨 준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뒤 상반신만 나오게 잘 찍어 보라 한다. 카메라를 보고 웃는 얼굴 앞에서 나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몰라 몰래 손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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