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를 키우는 당신의 컨텐츠/도서리뷰

방구석 미술관 2 프리다 칼로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강렬한 색채와 개성넘치는 표현으로

고통을 토해낸 화가 프리다 칼로를 소개합니다.

저는 2003년 개봉한 셀마 헤이엑 주연의 영화 프리다를 보고

멕시코 국민화가 프리다 칼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에 태어나

6세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게 됩니다.

18세 때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서른 번이 넘는 수술을 합니다.

평생 강철 코르셋을 입고 몸을 지탱해야 하며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21세에 43세의 디에고 리베라의 세 번째 부인이 됩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음에도 임신을 해서 두 번 유산합니다.

두 번째 유산으로 크게 상심한 시기에

디에고 리베라가 처제, 프리다의 동생과 불륜을 저지릅니다...

.................... 여기까지 쓰고 심호흡을 세 번 했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나는 원래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안에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고

무언가 다른 걸 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방구석 미술관 발췌

 

1926년,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프리다와 디에고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프리다가 자신의 그림을 평가받기 위해

무작정 디에고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둘을 연결시켜 준 건

둘 다 멕시코 혁명 공산당원이었다는 거지요.

결혼 전 벽화에 프리다를 그려 넣을 정도로

디에고가 프리다를 예뻐한 듯 보입니다.

 

1928년, 디에고 리베라 , ‘ 무기고 ’

 

결혼 후 프리다는 그림을 접고 디에고 리베라의 내조에 전념합니다.

디에고가 사랑한 맥시코 테우아나족 전통의상을 입기 시작하죠.

아래 그림에 보면 둘 사이에 이미 균열이 있어 보입니다.

디에고는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딴청을 피우듯 보입니다.

프라다는 고개를 남편 쪽으로 기울여 애정을 표현하지만

생기 없이 뚱한 표정입니다.

프리다의 부모님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식같다며

결혼을 반대하셨다는데 정말 코끼리와 비둘기가 연상되네요.

 

1931년, ‘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

 

두 번의 유산으로 고통에 빠진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연필과 종이를 선물하고 프리다는 다시 그림을 그립니다.

아래 그림은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고통입니다.

 

1932년, ' 떠 있는 침대 '

 

디에고는 아내의 고통에는 무감했지만

프리다의 놀라운 재능은 알아챘습니다.

프리다는 기존의 어떤 예술사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개성 넘치는 걸작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진실을 직시하고,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고통을 감내하는 프리다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었다.”

 

디에고는 같은 입으로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프리다는 이런 나의 역겨운 성격으로 인한 희생양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여인일 뿐이었다.”

 

프리다는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사건을 그립니다.

남편이 아내를 살인 후 법정에서

칼로 몇 번 찌른 것밖에 없었다.”고 변론했다는 사건입니다.

 

1935년, ‘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

 

직접 칼로 찔러야만 찌른 게 아닙니다.

나의 날 선 한 마디가,

나의 냉소 가득한 표정 하나가,

대수롭지 않은 행동 하나가,

무심하게 툭 던진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상대를 난도질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멕시코 전시, 뉴욕 전시, 파리 전시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프리다는 세계적인 화가 반열에 오릅니다.

이것이 내가 자유로워지는 방법이구나.

여행도 갈 수 있겠어.

디에고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어!”

 

아래 그림에 두 명의 프리다가 있습니다.

 

1939년, ‘ 두 명의 프리다 ’

오른쪽 프리다는 전통의상을 입고

한 손에 디에고의 메달이 쥐어져 있습니다.

왼쪽 프리다는 당시 유행하는 유럽풍 드레스 차림입니다.

가위로 심장과 연결된 혈관을 잘랐습니다.

방구석 미술관의 저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멕시코에 있던 과거의 프리다는

디에고를 심장처럼 쥐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 예술가, 독립적 여성으로 거듭난

유럽의 프리다는 디에고를 잘라버리겠다.

혈관을 자르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 번째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 번째는 디에고와 만난 것이다.”

이후 프리다 역시 여러 남자와 러브 어페어를 일으킵니다.

그럼에도 무명의 프리다가 예술가로 성공하는데

디에고의 역할이 컸습니다.

디에고가 준 고통이

프리다의 예술혼을 지핀 부분도 있겠지요.

극한의 고통을 예술혼으로 승화한 프리다 칼로의 삶이

제게는 경외로 다가왔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500페소 지폐에 그려져

현 시대에도 추앙받고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도 출간되어 있습니다.

 


프리다의 백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통이지만

저도 척추뼈 압박 골절의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꽤나 심각해서 한 달 가까이 입원했습니다.

식사도 배변도 침대 위에 누워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퇴원 후에는 석 달 동안 척추를 지지해 주는

프라스틱 코르셋을 입고 지내야 했습니다.

철심을 박거나 의료용 콘크리트 재건술 없이

완치 판정을 받은 건 기적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천상의 예술혼과 극한 고통이 함께 포장된 선물을 내민다면,

Nooooo, thank you!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대단한 예술혼을 불태우며 그림이나 글을 창작하지 않아도,

누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매일 씻고 밥 먹고 산책하는 것도 고통에 맞서는 겁니다.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다는 것,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는 것을, 머리로만 알지 말고

심장에 박히도록 주문처럼 외우는 겁니다.

제가 플라스틱 코르셋(척추 지지용 의료기)을 입고 했던 일이지요.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고마운 당신,

날마다 안녕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글

(아래 공감 누르기는 제게 더 잘 쓰라는 격려가 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