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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삶 사랑.../일상 소소한 이야기

옛날의 그집 박경리 문학 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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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단구동 맛집 영순이 해물찜은 박경리 문학공원 옆에 있다. 낙지 전복 꽃게 아구 생태 등 신선한 해산물찜을 먹을 수 있어서 가끔 가곤했다. 애주가인 도반은 자동차를 두고 택시로 이동했다. 택시로 3500원도 안되는 거리였다.

산책 삼아 박경리문학공원을 다니는 요즘, 걸어서 20분도 안되는 거리를 택시타고 이동했다는 것에 실소가 나온다.
자주 다니는 길은 가깝게 느껴진다. 반복되는 풍경은 뇌가 건성으로 응축해서 처리(전문용어는 잊었다)해서 그렇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새로운 것을 체험한 날은 유독 길다고 느껴지는 게 다 이유가 있었네. 색다른 경험은 뇌를 건강하게 만든다. 인생을 길게 살려면 낯선 환경을 즐길 일이다.


박경리 문학공원의 조용하고 아담하고 정갈한 느낌이 좋다. 박경리 선생님이 사셨던 집 입구에 서면 친한 지인집에 방문한 양 반갑다.
곳곳에 박선생님의 시와 글이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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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그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횡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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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의 사위인 시인 김지하님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있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의 담시 (譚詩) 「오적(五賊)이 문제였다. 오적은 ‘다섯 도둑놈’이라는 뜻으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일컫는다.

박선생은 가장이 수감 된 딸과 손주를 위해 원주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원주집에서 '토지'를 계속 집필하셨고 소천하실 때까지 사시다가 고향인 통영에 안장되셨다.


김지하 시인이 출옥하는 날 당시 기자였던 소설가 김훈 선생은 취재차 출옥 현장에 갔다고 한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손주를 업은 박경리 선생을 보았지만 모른채 했노라고 했다. 혹여 다른 기자의 눈에 띄어 인터뷰 당할까 저어했다고.

‘오적 필화사건’으로 인해 젊은 시인 ‘김지하'는 체제 저항 시인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되었다. 출옥 후 여러 기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위를 멀찍이서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는 박경리 선생님.


선생님은 암 투병도 겪어내셨다.

공원에 가면 호미 곁에 내려놓고 고양이와 쉬고 있는 선생님 동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곁에 살짝 앉아보거나 주위를 천천히 몇바퀴 돌기도 한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모진 세월이랄 거도 없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늙어서 편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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