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 목 : 음복(飮福)
저 자 : 강화길
출 판 사 : 문학동네
초판 1쇄 : 2020. 4. 8.
안녕하세요? 올리브나무입니다.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강화길 작가의 단편소설 <음복(飮福)>을 소개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 오정희님과 권여선님이 심사위원이셨네요.
저는 [토지], [태백산맥], [어린왕자], [인생], [자기 앞의 생]처럼 이야기 자체에서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는 소설을 좋아합니다. 기표와 기의를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설들입니다.
반면 정교한 소설기법으로 독자의 수준이 상당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은 제게 버겁습니다.
강화길 작가의 <음복>은 제게 버거운 소설이라 다 읽고 나서 ‘그래서? 이게 다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은교 평론가의 친절한 작품 해설을 읽으며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알게 되었지만 수긍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작품 해설 제목은 ‘여성주의 가족 스릴러’ 였고, 소제목으로 ‘‘무지’라는 권력, 아버지의 법과 여성 집행자들’, ‘아들과 딸, 젠더 분배의 성 정치’, ‘여성 쾌락의 구조 역학과 내적 전복’이 붙었습니다.
소설 음복 줄거리
7년간 연애 후 결혼한 ‘나’는 신혼 삼 개월 차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합니다. ‘나’에게 알 수 없는 적의감을 표현하는 시고모를 만나게 되지요. ‘나’에게 ‘애는 언제 낳을 거냐’는 무례한 질문을 하고 남편 정우에게 할아버지 생각은 나냐고 묻습니다. ‘나’는 몇 마디로 파악한 고모의 뒤틀린 심사를 서른 두 살의 ‘남편’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고모는 왜 서른 두해 동안이나 상대가 알지도 못하는 미움을 키웠던 걸가요?
소설의 첫 문장은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입니다. 화자인 ‘나’가 남편 정우를 생각하며 하는 독백입니다.
‘나’는 시할아버지 영정사진을 봅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짙은 눈썹 사이가 좁고 볼이 툭 불거진,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남자. 고요한 얼굴. 놀라울 정도로 남편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제사가 끝나고 제사 음식을 나눠 먹는 음복의 시간. 치매에 걸린 시할머니가 밥상 앞에 앉습니다. 잠시 후 할머니가 던진 숟가락이 나와 남편 사이로 날아옵니다. ‘꺼지라고. 제발 꺼리라고.’ 말하는 할머니.
시어머니는 서둘러 ‘나’와 정우를 귀가시킵니다. ‘나’는 귀가하는 길에 시어머니의 문자를 받지요.
[그러니까 내가 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말이야. 이를테면 시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며 함께 살고, 제사를 열심히 챙기기로 한 대신 시아버지는 너의 삶에 어떤 상관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 약속에는 나의 삶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며느리인 내게만 말해주기로 역시 약속했다는 것.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볼까. 나는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 내용이 담긴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시어머니는 글 말미에 이렇게 썼다. ‘그러니까 앞으로 제사에 오지 않아도 된단다.’ 그녀는 강조했다. ‘정우는 다 모르게 해줘.’]
남편인 정우는 뭘 몰라야할까요?
시고모와 시어머니, 시고모와 시할머니, 시고모와 나, 나와 시어머니, 나와 시할머니... 여성들은 알고 있는 것을 남편은 모릅니다. 오은교 평론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르는 것이 권력’이라고 해석합니다.
제사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 놓입니다. ‘토마토 고기찜’인데 월남전에서 돌아온 할아버지가 입맛이 변해서, 며느리인 시어머니가 고심하며 만들게 되었다는 요리입니다. 그 음식은 할아버지 생전에 겸상했던 정우만 맛있게 먹게 되지요.
강지희 평론가의 글도 흥미롭습니다.
‘시댁에 가서 첫 제사를 지내는 저녁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의 표면에는 특정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날이 선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여자들은 암투를 벌이는 후궁들처럼 악역을 도맡고, 돌봄과 감정노동을 이행하며, 은밀히 비밀을 전수한다. 그 핵심에 끝내 아무것도 모르는 무해한 남편이 있다. 그의 무지할 수 있는 권력이야말로 제사상 가운데 이물스럽게 놓인 토마토 고기찜처럼 가부장제의 핵심이었음이 드러날 때 전율이 찾아온다. 남성들은 폭력을 행사하거나 권위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온갖 비밀과 불안한 기류 앞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기소해본 적 없는 게으른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악이 된다.’
김미경님의 강의가 생각났습니다.
시댁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물건을 놓는 태도, 억양과 말투를 통해 미묘한 신경전을 벌입니다. 귀가하는 차 안.
며느리인 아내 : 오늘 어머니는 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
아들인 남편 : 엄마가 왜? 기분 좋아 보이시더만.
작가와 평론가들은 소설 음복 해설에 있어서 가부장제의 피해자 시고모가 미움을 쌓고 악역을 담당하는 듯 보이지만 진짜 악역은 고모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무지한 남편 정우라는 합의를 도출할 때, 저는 시어머니가 정우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집니다.
소설 도입부에 중국 드라마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과 나는 그 드라마를 좋아했다. 주인공이 악역 못지않게 악독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황제의 아이로 속이기까지 했다. 아주 능숙하고 대담하게.’
시할아버지와 놀랄 정도로 닮은 정우, 시할아버지가 즐겨 드신 토마토 고기찜을 맛있게 먹는 정우. 정우는 시할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아들일 거 같았습니다. 불임이었던 시어머니는 ‘아주 능숙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아들로 키웠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정우를 향해 숟가락을 날린 시할머니의 심정도 이해가 가고 시아버지가 정우나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사실 저는 막장 중에 막장을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불임은 시아버지고 시할아버지의 아들 정우를 낳은 건 시어머니라고요...)
다시 가부장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저의 어린 시절, 명절 때는 남자 밥상 여자 밥상이 따로 차려졌습니다. 모양 좋은 반찬은 남자들 밥상에 놓였지요. 저는 밥그릇을 남자들 밥상에 옮겨서 함께 먹곤 했습니다.
저는 사회 부조리를 고쳐보겠다는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 심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할 때가 많습니다.
도반(남편) : (결혼 초에 가끔 하던 말) 김치도 못 담그는 여자가 여자냐?
나 : 여자만 김치를 담그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나도 남이 담궈 주는 김치만 먹고 싶어요!! ‘나는 자연인이다’ 남자들은 혼자 김치며 장도 잘 담그더만.
도반이 가부장적 사고로 뭔가를 요구할 때, 저는 되묻습니다.
“내가 오빠에게 뭘 요구한 적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 그 흔한 잔소리도 한 적이 없잖아요. 나는 그저 오빠가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이야.”
제 마음이 넓어서 잔소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잔소리로 도반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 소중한 에너지를 잔소리로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요. 가부장적 가치관에 쩔어버린 도반과 소통을 단절하기로 선택한 것이기도 합니다. 연애시절 도반의 가부장적 성향을 왜 파악하지 못했을까요? 사랑에 빠진 저의 눈에 도반은 나를 보호해 주려는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로 보였습니다.^^
웹툰 드라마 ‘며느라기’는 가부장적 문화의 성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기에 누가 보아도 문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소설 ‘음복’은 평온해 보이는 장면에 날선 신경전을 묘사함으로써 드러나는 문제보다 얇게 가려진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음복’의 의미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사에 썼던 술을 제관들이 나누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본래는 제주를 마시는 것만을 가리켰으나 차츰 제사 음식을 나눠먹는 것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조상님께 올렸던 음식을 먹음으로써 조상의 복덕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화자인 ‘나’는 소설 말미에 ‘이것이 너의 드라마, 복(福)이 되길 바란’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진정한 복일까요?
소설 속 문장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중략)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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