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 목 : 인지 공간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
저 자 : 김초엽
출 판 사 : 문학동네
초판 1쇄 : 2020. 4. 8.
안녕하세요? 올리브나무입니다.
저처럼 SF 장르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추천합니다.
김초엽 작가의 단편 <인지 공간>은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었습니다.
‘나는 인지 공간의 관리자였다. 오랫동안 이곳을 위해 헌신했고 공동 지식의 조직화와 공간 확장 프로젝트에 지난 십 년을 쏟았다. 그런 내가 공간 밖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하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소설의 첫 세 문장입니다. 명민한 작가는 독자의 흥미를 단숨에 끄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지 공간이란 무엇일까? 화자인 ‘나’는 왜 공간 밖으로 나가려는가? 10년 차 직장인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까?’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설 인지 공간 줄거리
인지 공간은 인류의 모든 ‘앎’을 저장해 둔 곳입니다. ‘대를 이어 전승되는 신화들, 정교한 자연의 이치, 그리고 세계의 놀라운 구조’같은 것을 모아 놓은 거대한 격자 구조물입니다.
‘내가 평생 알았던 모든 것과 앞으로 알게 될 모든 것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떠나야 했다.’
사람들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인지 공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지 공간은 획일된 지식을 저장하며 인간 개개인의 특성이나 개별 기억은 저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지 공간을 떠나야만 진짜 세계를 직면할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그것은 내가 처음 떠올린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이브의 생각이었다.'
이브는 아주 작은 몸집으로 태어나고 성장도 더딘 바람에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약한 이브를 놀리고 괴롭혔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보육교사였는데 이브를 안타깝게 여기고 또래 중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쎈 ‘나’에게 이브를 잘 돌보아주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이브와 제나(나)의 우정은 시작됩니다.
제나(나) : 어른들이 해준 이야기인데, 저 한심한 괴롭힘도 곧 없던 일이 될 거래.
이브 : 왜?
제나 : 우린 아직 인지 공간에 들어가지 않았잖아.
이브 : 그게 무슨 상관인데?
제나 : 공동 지식을 배우기 시작하면, 우리는 동일시될 거야. 압도적인 지식 앞에서 우리의 사소한 차이는 무의미해지는 거지. 그러니까 저애들이 저러는 것도, 아직 어려서 그래. 곧 끝날 일이야.
그러나 이브는 너무 연약해서 인지 공간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이브를 위해 보조 장치를 만들어서 인지 공간의 저층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더 고차원적인 ‘인지’는 인지 공간의 고층에 있는데 이브는 접근하지 못하지요.
이브 : 공동 지식은 완벽하지 않아. 어떻게 세 번째 달을 잊을 수 있지? 제나, 정말로 공동 지식이 우리의 모든 기억을 점령하게 둬도 된다고 생각해?
이브는 개별적인 인지 공간을 만들고 싶어했고, 인지 공간에 비하면 조악하지만 개별 인지를 저장하는 장치 ‘스피어’를 만듭니다.
제나는 생각합니다.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하지만 스피어가 정말로 분열일까? 스피어를 갖게 된 우리는 정말로 같은 격자를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할지 모른다. 공동 인지 공간을 거닐면서도 각자의 스피어를 통해 진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영화 ‘이퀄리브리엄’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의무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약을 먹어야 합니다. 행동은 통제되며 모든 것이 획일화된 사회입니다. 각종 문학 작품은 금서가 되지요.
인지 공간에 접속해서 위대한 지식을 내 것과 같이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지만 나의 특별한 경험과 기억을 잊어버리며 사는 삶을 상상해 봅니다.
현실 세계에서 인지 공간과 유사한 곳은 도서관같은데요. 소설가 김영하 작가는 도서관 서가에서 뇌가 발기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느낌, 저도 알 거 같습니다. 책에 접속해서 많은 인지를 얻으며 희열을 느낍니다. 그러나 글이 아닌, 오감의 경험, 물성의 촉감을 강렬하게 원할 때가 있습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예쁜 카페에서 맡는 커피 향기, 사랑하는 이와 바라보던 노을, 흐드러진 벚꽃 길을 걷던 황홀함...
이야기의 초점을 살짝 옮겨보겠습니다.
싱글 모임 게시판에 어느 원숙한 여성이 글을 올렸습니다.
‘남자들은 그 밥에 그 나물’이라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지 공간의 획일화된 지식은 남자들을 ’그 밥에 그 나물로 묘사’하고 저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소중한 인연들을 다채로운 영상과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사랑스러운 부분이 달랐고 연약한 부분이 달랐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유명한 싯귀가 있지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구나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그 밥에 그 나물이라면, 이름을 예쁘게 부르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일 겁니다.
오래전,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던 이. 그의 뒷목에 있던 붉은 반점과 역방향으로 난 옆머리마저 사랑했었습니다.
며칠 전, 도반(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원주 복 추어탕 집에 다녀왔습니다. 남편은 앞서 가다가 슬몃 뒤를 돌아보며 자전거가 서툰 내가 잘 따라오나 보곤 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봄날, 도반의 자전거를 따라가면서 이처럼 평안한 나날이 지속되길 바랐습니다. 그 순간의 풍경이 영원과 맞닿은 듯 했지요.
나에게서 나만의 특별한 경험과 기억들이 지워진다면 나는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요.
일류 공동체의 위대한 인지 공간 vs. 나만의 특별한 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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