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일 때와 애인이 있을 때와 결혼 후의 크리스마스 느낌은 조금씩 달랐다. 솔로일 때는 휘황한 불빛 속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을 보고도 독야청청 일상을 살았다. 애인과 함께일 때는 은성한 불빛이 ‘화려한 조명처럼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결혼 후 신혼이 지나자 크리스마스는 다시 일상일 뿐이다.
“그렇다! 기독교인인 내게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님의 성스러운 탄신일이다.”라고 고백하기에는 나의 믿음의 키는 참... 자라지를 않는다.
도반(남편)은 여덟 살 연하인 나를 아이 취급한다. 아~~놔! 연애할 때, 나이 많은 연상과 처음 사귀어서 너무 재롱(애교?)을 부린 것이 원인일 것이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에 나를 위해서 트리 장식품을 사 왔다. 사 온 마음은 고맙지만 ‘조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내게 장식품은 먼지 쌓이는 ‘예쁜 쓰레기’일 뿐이다. 그래도 고등 동물인 나는 하얀 거짓말을 했다. “와~ 아기자기 예쁘네!”
각종 기념일은, 반복되는 일상을 스페셜하게 만들 수 있어서 가볍게 챙기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카페 드 마리아에서 가나슈 케이크와 크림치즈 케이크를 사고 케냐 더블A 원두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렸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티테이블을 장식했다.
도반 : 커피의 오묘한 맛이 환상적이구나!
나 : 케이크 한 입 먹고 커피를 마시면 커피향이 더 잘 느껴져요~
저녁은 오메가 생선구이를 포장해다 먹었다.
도반이 와인을 사 왔다.
연애시절 도반은 자신이 와인 애호가라면서 종종 와인을 사 주었다. 알고 보니 친하게 지내는 약사회 동료 K님을 따라다니며 마신 것이 전부였다. K님은 와인 값으로 적어도 일억 원은 썼다고 한다. 도반은 소.주. 애호가였다.
도반 : 와인 잔 좀 꺼내 봐.
나 : 선반 맨 위에 있어서 의자 놓고 꺼내야 해요.(대충 유리잔에 마시자는 뜻)
도반 : 의자 가져 올게.
와인은 무척 독하고 많이 달아서 낮은 등급을 드러냈고 두어 모금 마시고 도반 몰래 버렸다.
도반 : 오늘 저녁 운동 같이 가자.
나 : (이 무슨 날벼락인가!!) 어우~ 난 먹은 거 뒷정리랑 설거지도 해야 하고... 오빠 조심해서 다녀와요!
도반 :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함께 가자~
옷을 따뜻하게 챙겨 입고 따라나섰다. 도반은 거침없이 근린공원 쪽 야산으로 올라갔다.
도반 : 여기에 내가 아끼는 나무들이 있는데 어느 날 가보니 모두 잘려나간 거야. 저기 포크레인 보이지?
옅은 어둠 저편에 어슴푸레 포크레인이 보였다. 도반은 백치 아다다 같은 목소리(내 흉내를 낼 때 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반 : 이 나쁜 포크레인아! 우리 착한 나무들을 돌려다오!
나는 허리를 꺾고 웃었다. 이럴 때, 도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난다. 도반 안에 살고 있는 피터팬을 발견할 때 말이다. 처음 그에게 빠져든 건 카리스마 넘치는 언행과 박학다식함 때문이었다. ‘와인 마시는 약사님’의 이미지를 좋아했던 거였다. 그런데 ‘소주마시는 피터팬’이 더 사랑스럽다. 소주마시는 피터팬은, 같이 살아야 만날 수 있는 도반의 자아일 것이다.
도반의 특별 배려(?)로 한 시간 운동을 30분 만에 끝냈다. 도반은 나를 청춘 찹쌀씨앗 호떡집으로 데려갔다. 도반과 부산 여행할 때 이승기 씨앗 호떡을 먹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저녁식사로 음식이 목까지 찬 느낌이지만 역시 우리 부부는 뱃고래가 장난 아닌 것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호떡집 주변에서는 취식을 할 수 없어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나 : 오빠~ 호떡 잘 잡고 있어 봐요. 포스팅할 사진 좀 찍게요.
처음 블로그를 시작할 때 하루에 2~3달러 벌어서 뭘하겠냐고 시니컬하게 코웃음 치던 도반이 수익금을 나눠주기 시작하자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었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머니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호떡을 먹고 나자 도반은 신나게 아이스크림 전문점으로 향했다.
나 : 오빠~ 나는 도저히 못 먹을 거 같아요. 오빠 거만 사요.
도반 : 에이~ 먹으면 다 들어가는 거 알면서 그런다~
도반이 사 준 아이스크림은 도저히 못 먹겠어서 가방에 넣었다. 도반이 맛나게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으니 찍지 말라며 뒤돌아서서 먹는다. 그 모습이 더 귀여워서 마음이 간질 거렸다. (집에 가자마자 아이스크림을 냉동실 넣었다. 다음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도반이 냉동실에서 꺼내 오더니 같이 먹잖다. 도반은 운동을 위해 최대한 가볍게 입는다. 속에 도반의 여동생이 사 준 거위털 베스트를 입어서 춥지 않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 마무리로 스노우 앱으로 사진을 찍었다. 십 년은 젊게 나온 사진이었다.
다음 날 도반이 내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반밖에 없는 눈썹과 팔자주름까지 극사실 주의 기법을 사용했구나...
“소주먹는 피터팬이라도 괜찮다. 건강하게만 늙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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