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니가... 겁이나.”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하영은(송혜교 분) 대사다.
20~30대는 드라마를 보면서 앞날을 상상하겠지만
40대 이후는 옛날을 회상하게 된다.
나는 예뻐서 다시 보거나 특이해서 다시 보게 되는 외모는 아니다.
‘솔’음의 매끄러운 목소리와
조금쯤 예쁜 팔 다리로 시선을 끈 적은 있다.
결론적으로 나의 생김은
사회생활에서 특히 연애사에서 플러스나 마이너스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두 살 연하의 민재(가명)가 ‘첫 눈에 반했다’며
하트가 깜박이는 이모티콘을 넣은 이메일을 보냈을 때,
바람둥이라 판단하고 방어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자기애가 강한 나지만
스스로 첫 눈에 반할 외모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민재는 바람둥이는커녕 순수하고 믿음직스러운 이였다.
좋은 사람 민재는 정말 좋은 J를 만나 결혼했다.
민재를 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배웠다.
배움은 실천해야 하는 법.
두 살 연하의 류(가명)가 다가왔을 때,
후회 없이 타오르는 불꽃같은 사랑을 했다.
예닐곱 살 조카 ♧ : 이모는 예쁜데 왜 00아저씨(류)랑 결혼하려고 해?
나 : 이모 눈에는 00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으니까!
서너 살 조카 ☆ : 이모는 우리 아빠가 멋있어~ 00 아저씨가 멋있어?
나 : 당연히 00아저씨지!
갑자기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조카 ☆이를 달래는 둘째 언니.
“☆아, 이모 눈에 아주 두꺼운 콩깍지가 씌어서 그래. 우리 ☆이 아빠가 훨씬 더 멋있어! 00아저씨는 이모 아니면 결혼해줄 여자도 없을 거야.”
세 모녀의 말에 깔깔깔 웃을 수 있었던 건, 류는 정말 멋진 사람이래서다.
“그거 알아요? 남자는 자기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면서 수컷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류의 따뜻함이나 처세술에 능한 엽렵함뿐 아니라
살짝 용기 없음, 우유부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좋은 사람, 고마운 사람으로 추억의 방에 갈무리돼있다.
류와 사랑과 이별을 겪어내느라 십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섣불리 누군가와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막연히
연하보다는 마음이 정말 넓고 연륜이 깊은 연상을 만났으면 싶었다.
마음의 넓이나 연륜의 깊이가 나이에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오래 전, 싱글들의 친목 모임은 늘 즐거웠다.
맛있는 음식과 술, 잘 차려입은 선남선녀의 대화.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행동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모임 회장 B : 아마네가 모임 후기 올릴 거지?
나 : 시간 없을 거 같은데요.
B : 회비 면제해 줄게.
나 : 그냥 회비 낼게요~
B : 여기 있는 여성 회비 다 면제해 줄게.
그렇게 모임 후기를 올리면서 스텝인 듯 스텝 아닌 스텝 같은 회원이 되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서른 중반이 넘어간 여자는
‘밥벌이의 지겨움’이 극에 달해서 자기를 부양해줄 남자를 원했다.
그러나 서른 중반이 넘어간 남자들 역시 밥벌이는 지난한 것이었다.
고용불안과 사오정시대에
남자는 부양자보다 경제 문제를 함께 해쳐나갈 반려자가 필요했다.
그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던 나는,
부양가족 하나쯤 벌어 먹일 수 있는 경제력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이성에게 인기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모임을 통해 내가 상당한 동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이든 싱글들은 명절이 달갑지 않다.
결혼 드립을 피해 여행을 가거나 했다.
설날 연휴를 앞두고 신촌에서 싱글 모임이 있었고 B의 전화가 왔다.
“아미네, 오늘 신촌으로 좀 와 줘. 다들 고향가고 스텝 할 사람이 없네.”
모임 장소로 가보니 40여명의 회원들이 식사 중이었다.
혼자서 출석 인원을 체크하고 회비를 걷느라 바빴는데,
“도와줄까요?”
R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
R은 편한 구스 점퍼가 아닌 다부진 몸매에 딱 맞는 울코트 차림이었다.
캐시미어 목도리를 둘둘 감은 것이 아니라 반듯하게 접어서 크로스로 코디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R은 네 살 연하였다.
나 :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R : 고마우면 밥 사요~
나 : 연하랑은 밥 안 먹어요~
R : 밥 사라고 했지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닌데요?
나는 빵 터졌다.
송파 석촌호수 부근의 이탈리안 식당에서 R에게 밥을 샀다.
R과 이런 저런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말이 정말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식사 후 칼바람이 부는데 석촌호수를 돌았다.
R : 난 이렇게 칼바람이 부는 날이 좋아요. 정신이 맑아지거든.
산책 후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R : 아메리카노 말고 따끈한 캐모마일 마셔요.
아미네님처럼 섬세한 사람은 캐모마일이 어울려요.
나의 섬세함을 알아봐주는 그 역시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이런 과감한 행동을 하도록 내가 곁을 준 것이겠지.
가만히 있을까 손을 빼낼까...
오래도록 혼수상태였던 연애세포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가 사귀자고 한 것도,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서 미래를 시뮬레이션했다.
류의 부모는 두 살 연상인 나를 반대했다.
R의 부모가 네 살 연상인 나를 반기기 쉽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이를 낳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동안이라 한들 그에게 어울리는 또래,
나보다 여덟 살쯤 어린 여자들에게 질투하지 않기가 쉬울까...........
R과의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R에게서 서너 번의 안부 전화를 받았지만 만나지 않았다.
하영은의 “나는 지금 니가... 겁이나”라는 심정,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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