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가명)은 나를 무척 좋아해 주었고 나를 좋아해주는 수련이 나도 좋았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을까.
수련은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오래도록 통화하는 걸 좋아하는데
나는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안부는 톡으로’가 좋았다.
콜 포비아 정도는 아니지만
전화는, 혼자만의 평온한 상태에 파문을 일으켜서 좋아하지 않는다.
통화가 30분이 지나면 이제 끊자는 멘트를 한다.
나 : 그랬구나.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
수련 : 응~ 다음에 만나~ 아, 참! 나 00000 샀는데 그거 참 좋더라.
이후 20분 더 넘게 이어지는 통화.
친구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수련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무심한 남편에 대한 반복 레퍼토리에 지쳐갔다.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웃님 포스팅에서 ‘에너지 뱀파이어’가 있다는 글을 읽었다.
수련은 나를 좋아해주고, 나를 잘 챙겨주고,
심성이 착하고, 해맑은 웃음이 있고... 좋은 사람이다.
수련은 변한 게 없는데 내가 변했구나.
가수 양준일이 말했다.
“열심히 배우세요. 남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더 배우세요. 내가 남을 무시하지 않도록.”
수련을 위로하고 공감해주며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내가 조언을 시작했다.
“시어머니와 남편을 네가 고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만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야.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니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봐.
문제만 바라보고 골몰하면 문제가 더 커 보이거든.“
가끔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가 먹고 싶어’, ‘나의 두 사람’, ‘생각의 각도’...
나 : 김미경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독서를 통해서 내가 커지면 삶의 조망권이 높아진대. 삶의 조망권이 넓어지면 넓고 멀리 볼 수 있어서 좋지.
수련 : 난 책을 보면 머리가 아파.
인간관계가 원만하려면
‘맞는 말을 하기 보다 사랑의 말을 하라’고 한다.
수련이 원하는 따뜻한 위로와 공감이 아닌 누구나 아는 충고를 해 준 나.
나의 충고가 거듭되자 수련의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나 :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기생충에 대해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고 한 줄 평을 했었거든. 그런데 일부 누리꾼들이 ‘명징’과 ‘직조’를 보고, 왜 쓸데없이 어려운 단어를 썼냐고 악플을 달았대.
혹자는 칼럼에서 명징과 직조를 모르는 젊은이들의 무지에 대해 개탄하는 글을 썼던데 난 무지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봐. 정말 큰 문제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단어를 적확하게 쓴 사람을 공격한다는 사실이지. 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새 단어를 배운다는 생각에 즐겁던데.
수련 : 영화평론가가 잘난 체했네! 쉬운 단어 많이 두고 명징과 직조를 써야 했나!!
......
수련의 방어기제를 작동 시킨 건, 잘난 체한, 나다.
나는, 인생 지혜서에 나오는, 좋은 친구의 자질이 있을까.
나를 깊이 들여다 본 결과, 아니었다.
내 모든 걸 기꺼이 내어 주는 좋은 친구는 아니라도,
좀 떨어져서 잘 되기를 응원하는 좋은 지인은 될 수 있을 거 같다.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동양북스, 오카다 다카시)’라는 책을 들었다.(전자책 듣기 기능.)
책에 ‘회피형 인격장애’에 대해 나온다.
인격장애까지는 아니어도 회피형 인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키르케고르, 헤르만 헤세, 조앤 롤링, 융, 톨킨 등도 회피형 인간으로 볼 수 있단다.
학창시절에는 반장, 사회인 모임에서는 총무를 도맡았고
회사에서는 과장, 팀장까지 올랐던 나는,
사회성이 발달했지만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한 회피형 인간같다.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단풍과 함께 라면 고독마저 감미롭다.
회피형 인간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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