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 삶 사랑.../일상 소소한 이야기

My funny White Day

반응형

내가 생각하기에 돈이 많아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원하는 만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는 거다.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인데, 십 수억 대 자산가 노인(70?)이 여가 시간에 폐지를 줍는다고 한다. 그는 평생 아끼고 아껴서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몸에 익은 습관대로 매사에 아끼며 지금도 폐지를 줍는 것이리라. 그렇게 아껴서 천국가시면서 사회에 기부하시려나. 산다는 게 뭔지...

 

도반과 나는 가난한 유년과 성장기를 보냈다. 시아버지는 대졸 고학력자셨는데 돈 버는 능력은 학력과 별개였다. LP 감상에 심취하신 시아버지의 모습은, 도반이 그리워하는 추억의 한 자락이다. 매사에 예민한 도반은 청각도 예민해서 스피커 설치에 열심을 내곤했다. 좋은 스피커를 찾는 도반의 모습이,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그의 문화 향유 모습이다.

 

가난은, 좋은 문화에 노출될 기회를 차단하기에, 문화가 좋은지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향유의 욕구도 없다. 소비에는 소비자의 취향이 드러난다. 그러나 가성비만 따지는 삶에는 취향이란 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내가 대학에서 경험한 가장 값진 자산은, ‘문화였다. 넘쳐나는 인쇄물, 축제, 영화, 연극, 콘서트, 전시회... 문화는 참으로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법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약학을 전공하느라 대학을 두 번이나 다닌 도반은, 전문직 고소득자가 된 후에도 문화를 향유할 줄 몰랐다. 더 정확히는 인본주의적인 문화는 헛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세상을 도량 삼아 함께 도를 닦자고 도반. 도반이나 나나 도력은 평균이하인데 문화 향유를 통한 교양도 없으니...

 

수년 전, ‘김광석 다시 부르기콘서트가 원주에서 열렸다.

: 오빠, ‘김광석 다시 부르기콘서트가 치악 체육관에서 열린대요. 이번 토요일에 같이 가요~

도반 : 평창(전원주택)에 할 일이 태산이야.

 

콘서트는 혼자 가서 즐겼다. 평창에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수년 전,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 때.

: 오빠, 이번 토욜에 꽃양귀비 축제 함께 가요~

도반 : 평창에 할 일이 태산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도반은 함께 꽃양귀비 축제에 가주었다. 급한 용무를 보듯 축제장을 빠르게 한 바퀴 돌고 막국수를 후루룩 먹고는 평창으로 가버렸다.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원주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

 

연애 시절, 주말마다 함께 경치 좋은 곳을 한들한들 산책하던 그 여유는 어디로 갔을까. 그 옛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나를 감동시켰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이번 화이트데이.

부탁이 어색했지만 용기를 내서 말했다.

: 오빠, 화이트데이에 아무것도 필요 없고 프리지어 한 단만 사 주세요~

마이 퍼니 화이트 데이

 

화이트데이에 도반이 내민 조화弔花를 연상시키는 조화造花 한 송이.

조잡한 조화가 트리거가 되어서,

그간,

도반과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힘들었던 순간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못난 자기연민에 빠져 울고 싶어지는 마음을 다잡느라 심호흡을 몇 차례 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해석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1 - 나이가 몇인데 겨우 이만한 일로 자기연민에 빠지는 게 말이 되니?

2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내 안에 소녀가 살고 있어. 그 소녀가 울고 싶은 거야...

 

1 - 꽃을 사 달라는 부탁을 무지르지 않고 그래도 조화라도 사 온 게 어디야. 고마운 일이지.

2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어. 필요는 알아서 채웠고 엄마는 그런 나를 대견해 하셨지. 나중에 심리학책에 보니 욕구 표현에 반응을 받지 못하고 매번 좌절한 아이는 서서히 주변에 기대를 하지 않게 된대. 어릴 적 방치되었던 양육 환경으로, 나는 사소한 부탁조차 힘들어 하는 심리 장애가 생긴 걸 거야. 도반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일이라곤 없었잖아.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고작 프리지어 한 단 이었다구...

 

1 프리지어는 매년 봄마다 내돈내산이었잖아~ 올해도 씩씩하게 내돈내산 하면 돼. 외부에서 사랑과 인정을 갈구 하지마. 조화 장미 한 송이도 지구촌 어디에선 사치일 수 있음을 헤아려 보길. 

에피파니

 

‘I'm the one I should love in this world

빛나는 나를, 소중한 내 영혼을

이제야 깨달아 so I love me

좀 부족해도 너무 아름다운 걸

I'm the one I should love’ - BTS 진, Epiphany(통찰, 깨달음) 가사 중

 

블로그의 다른 글 읽기

쁘띠 또라이 부부의 세계

쁘띠 또라이 부부의 라스트 크리스마스

(아래 공감누르기는 더 잘 쓰라는 격려가 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