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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삶 사랑.../사람, 사랑, 연애, 결혼 이야기

착하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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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한경애 여사는 삼형제를 키웠다. 극중 장남이 마흔이니까 스물다섯 즈음에 첫 애를 낳았다면 올해 예순 넷 안팎일 것이다.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기에 삼시 세끼를 소홀함 없이 차려야했으니 그 수고로움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경애 여사는 넋 나간 표정으로 식탁 앞에 홀로 앉아 아침, 점심, 저녁 끼니 챙기고 정리하다보면 하루가 다 간다고 독백한다.

 

살림이 힘들어도 의례 하는 것이려니 해나가던 한경애 여사는 진수정 여사의 등장으로 비교 대상이 생기자 당신의 신세가 처량해진다. 자기연민에 빠진 한경애 여사는 나는 쉬워서 찬밥 취급이냐!”는 말을 남기고 가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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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뚝딱 잘하는 사람에게도 살림은 많은 노동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주방에만 들어가면 작아지는 나는 드라마에서 손님 접대용 상차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온다. 주부가 된지 십 수 년이 지났어도 생선 만지기는 많이 꺼려진다. 비린내 없애는 뒷정리도 일이다. 생닭은 평생에 딱 한 번 사봤는데 그 징그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닭볶음탕을 만들면서 입에도 안 댔는데(레시피 대로 대충 간장 등 양념을 넣고 간도 안 봤다.) 식구들이 자작한 국물에 밥까지 비벼서 잘 먹었다.

 

 

식재료를 장 봐와서 정리하고 다듬고 씻기... 채썰기, 깍둑썰기, 어슷썰기, 반달썰기, 저미기, 다지기... 지지기, 볶기, 조리기, 찌기, 삶기... 오래 전 해외 국빈이 한상 가득 차려진 한식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요리사의 엄청난 노고가 느껴져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던가.

 

밖에서 돈 버는 노고 못지않게 전업주부의 노동도 인정받아야한다. 요즘 세대는 그렇지 않지만 꼰대 세대 중에는 집에서 살림하는 걸 놀고먹는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살림을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 평균 5시간 노동에 최저임금을 적용해도 한 달에 최소 150만 원이다. 여기에 육아까지 해야 한다면 최소 월 300만 원 이상의 근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입주 가사 도우미 월급이 400만 원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살림을 하다보면 좋은 것, 예쁜 것은 식구들 챙겨주고 나머지를 먹기 쉽다. 이런 게 습관 되면 남편도 애들도 자기들은 생선살을 먹고 엄마는 생선 대가리나 뼈에 붙은 살(고갈비가 맛있긴 하지만)을 먹는 게 당연시된다. 나는 먹는 거에 진심이라 좋은 것, 예쁜 것을 모두 골고루 먹게 준비하지만 아무래도 더 좋은 것은 식구들에게 양보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나를 대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대접해 줄까. 나 하나 참으면, 나 하나 희생하면 가정이 평화로우니까 참고 희생하다보면 나는 쉬워서 찬밥 취급이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사람 심리라는 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때기로 보고 보자보자하면 보자기로 보기 쉽다. 살림을 고마워하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일주일 정도 살림 파업을 해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남편의 손아래 친척 H가 있다. 1년에 서너 차례 집으로 인사 오는데 항상 도착하기 두어 시간 전에 방문한다고 연락 온다. 요리에 관심이 없어서 상비하는 식재료도 없고 짧은 시간 안에 요리할 실력은 더더욱 없다. 남편의 치병을 위해 외식을 자제 중이라 식당에도 못 간다. 음식을 사서 대접한다지만 그래도 접대용 과일 등 장을 봐야 해서 급하게 움직여야한다. 방문하려면 최소한 하루 전에 미리 연락 달라고 매번 부탁해도 소용없다. 올해 초에는 처음 보는 손님까지 대동하고 나타나서 두 배로 당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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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중순.

남편 : 미달이(가명)가 온다네. 삼계탕 사다 논 거 있지? 삼계탕이랑 김치면 돼.

삼복더위에 손님은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거다. 삼계탕을 꺼내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에 이미 점심 먹고 다 치웠는데 삼계탕이라니. 참지 않기로 했다.

 

: 내가 하루 전에 연락 달라고 그렇~게 많이 부탁했는데 또 갑자기 오네? 이제 미리 연락하지 않으면 나도 식사 대접 안할 거예요. , 카페에 가 있을 테니까 오빠가 알아서 손님 대접하세요!

 

욱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10분쯤 지나자 화가 가라앉았다.

: 정말 삼계탕이랑 김치밖에 없어요. 딱 그거만 차려낼 거예요.

남편 :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기분 상했을 때 나오는 존댓말) 손님은 정성으로 맞이해야지 싫은 마음으로 맞으면 되겠습니까.

 

이전의 나라면 남편의 기분을 풀어주는 말을 하고 웃는 얼굴로 손님을 대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 ~” 한마디 하고 책 한 권을 챙겨서 카페로 갔다. 한 시간 정도 있으니 너무 추워서 도서관으로 옮겼다.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책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일 년에 서너 번인데 참을 걸 그랬나 싶은 마음과 착한 여자 콤플렉스는 버리라는 마음이 갈등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갑자기 들이닥치는 미달이의 무개념에 대한 반감에 더해 약소하지만 종종 챙겨주었던 것들에 대한 보답이 전무한 서운함이 있었다. ‘보답을 바라며 주지는 말자, 주고 나서 깨끗이 잊을 만큼만 주자.’는 게 나의 처세술이었는데 미달이에게는 내 그릇에 넘치게 주었던 거 같다. 미달이도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것인가.

 

지이잉. 카톡 진동음이 울렸다. “갔으니 들어오시오.” 남편도 분명 서운했을 텐데 내색하지 않다니 놀라웠다.

 

도서관을 나서며 생각했다.

착하지 않아도 괜찮아. 돈 버는 일 외에 화를 참으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을까. 호의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거야. 얌체 같은 테이커에게 당하는 멍청한 기버는 되지 말자.’

 

다짐은 이렇게 했지만 앞으로도 남편을 생각해서 웃으며 미달이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다가 나의 수고가 아까운 날에는 주저 없이 카페도 가겠지. 착하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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