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햇살 세례 속, 사위(四圍)가 눈부신 주일 오전.
도반(남편)은 손바닥만한 땅을 돌보러 신림으로 떠났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마당에 물을 뿌린 후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정말 오랜만에 VOD 영화를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후두둑 빗소리.
요즘 내리는 비는,
오래전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에서 경험한 열대성 스콜과 닮았다.
맑은 날씨인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다가 다시 맑아지는.
하지만 오늘 비는 금방 그치지 않았다.
도반(남편)은 오토파지 효과를 기대하면서 주일 하루 금식한다.
그런데 6시쯤 집으로 돌아온 도반이 두부와 치악생막걸리를 내밀었다.
도반 : 비가 오니까 막걸리 생각이 나서.
도반은 어제 저녁으로 먹고 남은 매콤한 황태콩나물찜을 생각했을 것이다.
미각이 발달해서 입맛이 까다로운 도반이, 맛있다고 두 번이나 말한 반찬이었다.
황태콩나물찜을 데우고 잘 익은 배추 김치, 깻잎조림과 두부를 데쳐 안주로 내었다.
도반 : 포동이(내 애칭)가 바리스타가 되더니 음식 솜씨도 일취월장이야.
나 : MSG, 참기름, 들기름 전혀 안 써도 맛이 나서 신기하네요~
도반의 치병을 위해, 깨를 고온에 볶아서 짜는 참기름, 들기름은 먹지 않는다.
저온 압착 방식의 신선한 생들기름은 아주 가끔 사용한다.
도반은 내 음식 솜씨가 완만한 우상향 곡선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점프했다고 평했다.
나비효과랄까 연쇄반응이랄까.
커피 하나를 내리는데도 원두 품종, 신선도, 로스팅 정도, 온도, 분쇄도, 시간, 추출방법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걸 경험했다. 그러다 보니 요리에도 살짝 신경을 쓰게 된 거다. 반백 살이 넘고서야 진간장, 조선간장, 고추장, 된장, 설탕, 소금, 다시마, 멸치, 멸치액젓, 마늘, 파 등의 조화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카페같이 예쁜 환경에서 예쁜 찻잔에 마시고 싶다보니 청소도 자주하고 안 쓰던 찻잔도 꺼내 놓게 되었다. 책을 읽는 대신 예쁜 커피잔을 검색하고 앉아 있네.
막걸리가 한 순배 돌자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유튜브에서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도반의 신청곡 위주로 들었는데, 나도 좋아하는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도반은 입맛만 까다로운 게 아니라 귀도 예민해서 스피커 욕심도 많다.
비와 당신 – 럼블피쉬
사랑 안 해 - 백지영
가시 - 버즈
나에게 넌 너에게 난 – 자전거 탄 풍경
나 : ‘클래식’ 참 좋은 영화야. 내가 얘기했었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1년 쯤 지났을 때였어. 운전을 하는데 라디오에서 ‘나에게 넌, 너에게 난’이 흘러나오는 거야. 둘의 추억이 있는 노래도 아니었는데... 단지 가사가 마음에 박혀서 펑펑 눈물이 났어.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
도반 : 나도 얘기한 적 있지? 마흔에 수능을 보고 약학과에 입학했는데 집안 사정상 휴학하고 막노동을 할 때였어. 과 소식을 알아볼겸 약학과 홈페이지에 접속했는데 배경음악으로 이 노래가 흘러 나왔어. 암울한 상황을 헤어날 수 없을 거 같은 절망감에 눈물이 났지...
돈 플레이 유어 락앤롤 투 미 – 스모키
도반 : (유튜브 검색을 하는 내게) 플레이가 아니라 프레이로 검색해 봐.
나 : 오빠~ 다른 건 오빠가 다 잘 알아도 영어는 내가 오빠보다 아주 조금 더 잘 알잖아?! 플레이는 연주하다고 프레이는 기도야.
도반 : 그래, 그래~ 알았다.
애니씽 댓츠 파트 어브 유 – 앨비스 프레슬리
도반 : 앨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거... 제목이 뭐더라?
우리나라 가수가 부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인데.
나 : 낙엽따라가 앨비스 프레슬리 원곡이었어?
잠깐만 기다려요. 검색하면 다~~ 나와.
Anything that's Part of You – 앨비스 프레슬리
I memorize the note you sent
당신이 보낸 글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Go all the places that we went
우리가 함께 갔던 곳들을 돌아다녔지요.
I seem to search the whole day through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에 대한 사소한 무엇이라도 찾으려고
온종일 돌아다닌 거 같아요.
I kept a ribbon from your hair
당신의 머리 리본을 간직하고 있어요.
A breath of perfume lingers there
아직도 당신의 향수 향기가 남아있네요.
It helps to cheer me when I'm blue
내가 우울할 때면 기운을 북돋아주네요.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의 사소한 흔적조차도.
Oh how it hurts to miss you so
당신이 그리워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몰라요.
When I know you don't love me anymore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To go on needing you
Knowing you don't need me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당신을 원하게 되네요.
No reason left for me to live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어요.
What can I take what can I give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주어야할까요.
When I'd give all of someone new
내가 새로운 사람에게 모든 걸 준다해도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의 흔적들일 뿐인데.
나 : 오빠! 누굴 생각하며 이런 노랠 신청한 거죠?
도반의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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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 : 날쑨이(내 애칭)가 또 씰데 없는 소리하네~
나 : 가사가 이런 줄 몰랐네.
구구절절이 마음에 팍팍 꽂혀.
오빠 덕분에 좋은 노래 알게 되었네. 고마워요.
오늘부로 Anything that's Part of You는 ‘내게로 와 꽃이 된’ 노래야.
아주 오래 전.
서른 중반의 나는, ‘탈대로 다 탄 사랑’을 한 후,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앨비스 프레슬리가 노래했듯
‘새로운 사람에게 모든 걸 준다 해도 당신의 흔적들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월은 약이 되고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
과거의 내가 발화할 수 있었던 사랑의 온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지금, 내가 피워낼 수 있는, 최고의 온도면 된다.
“이게 최선입니까?”라는 물음에 “네.”라면 OK다.
최선의 기준은, 내가 정한다.
‘스스로를 감동시킬 정도가 되어야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 소설가 조정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싱싱한 감자, 당근, 사과를 손질해서 착즙해 주는 것.
잘 익은 과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은 도반에게 양보하는 것.
나의 최선들 중 일부다.
브라더 루이 - 모던 토킹
도반 - 날쑨이 요즘 앵무새 루이 좋아하잖아.
너무 쒼나는 노래에 두둠칫 어깨를 들썩였다.
도반 – 쫌 가만히 있어라. 점잖게 감상해야지~
나 – (도반의 시선을 닿지 않는 뒤로 물러나 앉으며 더 격렬한 어깨춤을 추었다.) 이제 내가 안 보이지? 다른 사람들은 가끔씩 흥을 발산하는 나를 좋아해 주고 재밌다고 하는데~ 오빠랑은 차암 안 맞아~
근데 뭐, 맞지 않아도 괜찮아. 상대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주면 되지. 당신은 점잖게 감상하시오. 나는 어깨춤을 추겠오~
마이 하트 윌 고 온 – 셀린 디온
남편의 최애곡 중 하나다.
들을 때마다 애틋함이 가슴 밑바닥에 고이는 곡.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 – 퀸
브레이크 프리는 참을 수 없지!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도반도 포기한다. 현명하다.
다음 생에는 점잖은 여자 만나기를! 진심!!
‘보헤미안 랩소디’는, 도반과 영화관에서 함께 본 영화 중 하나다.
리얼리티 - 라붐 ost
라디오 가가 – 퀸
......
You've yet to have your finest hour
......
Radio someone still loves you
......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 임영웅 (원곡 : 동물원)
아윌 올웨즈 러브 유 – 휘트니 휴스톤
나 : ‘보디가드’ 촬영당시 케빈 코스트너랑 휘트니 휴스톤이랑 사이가 너무 안 좋았대요. 그런데도 둘이 참 아름다운 장면을 찍었네. 돈만 준다문~
도반 : 보디가드 역할이 참 대단했지.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그렇게 성실하게 자기 일을 잘 할 사람이 어디 흔하겠어?
나 : 풉... 푸하하하하~ 오빤 영화 감상 포인트도 독특한 사람이야. 탑 스타와 보디가드의 애틋한 사랑, 그런 건 기억 안 나?
넬라판타지아 - 박기영 (영화 미션 OST)
야곱의 축복 - 소리엘
도반 :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가지, 그거 틀어봐.
뭐지?
실컷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holy한 선곡은???
오락 자리에서 찬양곡을 듣는 것은 불경한 일 같기도.
오락 중에도 찬양곡을 사모하는 건 기특한 일 인 거 같기도.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푸른 열매처럼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삶에 가득히 넘쳐날 거야.
너는 어떤 시련이 와도 능히 이겨낼 강한 팔이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와 언제나 함께하시니
너는 하나님의 사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며 네 길을 축복할 거야.
너는 하나님의 선물 사랑스런 하나님의 열매
주의 품에 꽃피운 나무가 되어줘.‘
이번 주일 저녁은 ‘야곱의 축복’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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